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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리뷰오브북스

생성일
2021/04/24 18:33
태그
도서
Review
밑줄 그은 문장
“현대보다 나을 리 없는 미래 대신 익숙한 과거로 퇴행하는 움직임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retrotopia』에서 경고한 대로 적대와 폭력을 심화시킵니다. (무해의 시대 – 김홍중)”
“사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끈끈하게 엉겨붙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점착성을 띠는 눈빛, 달라붙는 태도, 사적 영역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들의 ‘가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해의 시대 – 김홍중)”
“팬데믹 속에서 타인은 이웃이나 시민이기 이전에 잠재적 감염원이다. (무해의 시대 – 김홍중)”
“벡에 의하면, 위험사회의 시민들은 막스 베버가 예견한 자본주의적 ‘철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비판한 ‘도구적 합리성’을 폄하하지 않는다. 미셸 푸코가 분석한 ‘파놉티콘’과 규율 권력에 공포심을 갖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관리되는 세계의 합리성”을 기대한다. 유럽의 대표적 비판 지성들이 디스토피아로 형상화해 온 (안전을 지켜주는) 통제된 감시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민중이 꿈꾸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무해의 시대 – 김홍중)”
“그의 그늘이 남았는지, 나는 아직도 ‘아무도 버리지 말자고, 아무도 죽어선 안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경이롭다. 낙오없고 고통 없고 재해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안전에 집착하다가는 빗장 달아걸거나 수용소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안전 위에서 비로소 자유롭고 존엄할 수 있다고 여기기보다 자유와 존엄 위에서 안전이 추구돼야 한다고 여긴다. 즉 나는, 몰카 걱정에 공중화장실을 꺼려 방광염에 결렸다는 A에게 “뭐 그렇게까지 미친놈들한데 신경을 써요?”라고 말하는 아줌마고, 소라넷과 N번방 충격에 가족마저 의심케 됐다는 B 앞에서 “그래도 제정신인 사람이 많지 않겠어요?”라고 대꾸하는 기성세대이며, 피해자 우선주의를 당연시하는 C에 대해서 “피해자의 자리가 선점되면 다른 이의가 차단되는 폐해도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요?”라고 딴지 거는 명자 또는 흉자다. 밤길은커녕 낮의 외진 산길에서조차 식은땀 흘리면서도 그렇다. (밤길을 걷는 법 – 권보드래)”
“’안전’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까. 가령 ‘안전’의 주체로 호명되는 ‘여성’을 위해서는 치안과 성평등이, ‘청년’을 위해서는 직업과 주거공간이 갖춰지면 되는 것일까. 함께 ‘안전’해야 할 다른 주체들의 자리는 어디 있는가. ‘안전’을 우선시하는 한 정부와 국가의 개입, 감시와 통제와 증명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 것일까…여성과 청년과 난민과 빈민이 뒤죽박주되고ㅡ, 최소장치와 최대요구가 뒤섞이고,ㅡ 자연과 사회가, 불공정과 재난과 범죄가 뒤얽힌다… (밤길을 걷는 법 – 권보드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정서적 안전을 점점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정말 형성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문화가 하이트와 루키아노프의 주장처럼 정서적 안전을 표현과 사상의 자유보다 중시하는 안전주의적 성격을 띤다면,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긴 셈이다. 우리가 독재와 억압의 세계사를 경험하며 터득한 바가 맞는다면, 자유로운 토론을 사회의 “생명선”으로 여기는 자유주의 이상이 간단하게 부정할 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취소가 문화가 되지 않으려면 – 송지우)”
“그런데 권력에 따른 취소문화의 선택적 적용이 문제라면, 두 가지 대응이 가능하다. 취소문화를 확장하여 모두를 취소의 위험에 노출하는 길이 있고, 전면적으로 축소하여 누구도 섣불리 취소되지 않도록 하는 길이 있다. 자유주의자는 후자가 맞는 길이라고 보고, 젊은 세대가 전자의 길을 가려는 듯해서 걱정한다…(취소가 문화가 되지 않으려면 – 송지우)”
“통제에 반발하며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이들은 광장에 모여 연대하고 있고, 공동체의 집단적 안전을 부르짖는 이들은 각자의 집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감염병 시대의 역설이다(안전의 두 얼굴 – 박한선)”
“특히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죄악시한 것은 교회가 결혼에 개입해서 가족의 구성을 통제하기 시작한 12세기 이후라는 것이 여러 역사적 연구를 참조해서 얻어낸 저자의 판단이다. 이렇게 이성애와 동성애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엄격하게 나눈 교회의 교리는 이후 근대 산업 사회에서 더 강화되었다. 남녀가 결합해서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고, 남녀가 각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담당하는 가정을 이상화하는 젠더 이데올로기는 동성애를 비정상이라는 병적인 구역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홍성욱)”
안전한 근황
# 작년 3월, 그러니까 감염병 소식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할 무렵. 베트남 가족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이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한다고 했을 때,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나는 학생이 학습하고 싶다고 하는 데, 막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직원은 바이러스 검사를 받고 1주간 자가격리를 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때만해도 바이러스 이름도 명명되지 않을 때라서, 별다른 절차나 법적 기준도 없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라고 강요하는 직원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압적이라고 생각했다. ‘격리’라는 단어를 쉽게 뱉는 모습을 보고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지금 시점이라면 어떨까? 법적 기준을 차지하고라도 그때처럼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었을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걸까? 아니 그때도 나만 위험감수성이 낮았나?
# 비몽사몽 집을 나섰다. 집 앞 도로의 횡단보도를 지난 후, 마스크를 끼고 있지 않음을 깨달었다. 그제서야 오늘따라 사람들의 시선과 자주 마주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특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계속 쳐다보면서 간격을 두던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늘했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마치 늦은 밤 귀갓길, 우연찮게 여성의 뒤에서 걷게 되면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떠오른다. 본의 아니게 잠재적 가해자로 여겨지는 느낌. 그래서 걸음의 속도를 내어 여성을 빠르게 제쳤던 이상한 레이스. 신뢰하지 못하는 누군가로 인식되었다는 불편한(혹은 다소 억울한) 심정. ‘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 짧은 순간에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다.
# 야근 후 늦은 퇴근길. 도로에는 배달 오토바이가 빠르게 지나간다. 저들은 심야에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까? 24시간 기사 식당들도 다 문을 닫았을 텐데. 동대문 도매상권 등, 야간 노동자만 대상으로 영업했던 상인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왜 그들의 목소리는 잘 들려오지 않았을까? 왜 더 힘든 사람 소수자에게 피해는 가중되는 것일까. 그들이 방역을 위해하는 행위를 한다고 해서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