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그은 문장
예수님이 “일어나 걸어라”라고 말하지 않고, “걷지 않아도 좋으니 (네 방식대로) 당당히 일어나라”라고 말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장애에 관한 주된 과학기술 담론이 얼마간 어떤 존재들을 더 소외시키거나 그저 소비한다는 점..
고주파수의 알람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의 청각신경을 치료하고 교정하는 것과, 내가 잠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진동 기능이 있는 시계를 만드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가까운 길일까?
이렇게 논쟁적이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장애인의 ‘결함’을 보조하는 장비로 여겨지던 목발, 의족, 휠체어, 보청기, 흰 지팡이, 스마트 기기 등을 더 이상 외부에 부수된 보조장치로만 여길 수 없다는 점이다.
법률상 ‘장애인 보장구’라는 이름으로 규정되고
과학이 장애를 여전히 ‘없음의 상태(결여)’로만 바라본다면 휠체어는 기술적으로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여전히 보행 능력 ‘없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보조기기로만 간주될 것이다.
통상 청각장애인으로 정의되는 사람 가운데 수화언어를 제1의 언어로 쓰거나 정체성의 일부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농인이라고 부른다.
이 법에 따른 농인은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농문화 속에서 한국수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사람”을 뜻한다.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 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장애인들에게 정상성을 ‘선물’하고 비장애인들이 그것을 보며 감동받는 구도는 너무 흔하다.
처음 소리를 들었을 때의 감정이 기뿜이 아닌 공포나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
장애인들이 일상에서 실제로 이 기술을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어려움을 맞닥뜨리는지, 이 기술이 정말로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스텔라 영을 비롯한 많은 장애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이 감동 포르노의 범람을 지적해왔다. 비장애인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기 위한 도구로 장애인을 사물화하는 언론과 미디어를 비판하는 표현이다.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기술낙관주의의 홍보 대사로 동원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에 대한 낙관과 긍정이 하나의 사상이자 운동으로 발전한 경우다.
실리콘밸리의 ‘급진적 낙관주의’가 정말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찾아내더라도 그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적이다.
장애에 관한 기술 낙관론은 장애인들이 빈곤에 내몰리는 문제를, 첨단 기술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을 모른 척해야만 가능하다.
자폐인들은 이러한 의료화에 대응하여 자폐를 신경전형적(neurotypical)이지 않은 뇌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신경다양성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런 특성을 인류의 소중한 유전적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여 심각한 장애로 이어지는 측면들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언젠가 자폐증의 원인을 밝혀내겠다는 목표 아래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을 것이 아니라, 자폐인과 가족들이 지금 당장 좀 더 행복하고 건강하고 생산적이며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각 인종별 유전적 특성이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인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미뤄둔다거나, 언젠가 과학의 도움으로 걷게 될 때까지 휠체어 사용자들을 공공 건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어떨까?
이를 테면 신경다양성 개념이 보다 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대표하지 않는다거나, 신경다양성의 가치를 받아드링더라도 여전히 치료를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의료적 모델이 자리 잡을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장애를 가진 채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주장과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나올 치료법에 희망을 걸자는 주장 중에서 지나치게 후자에만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은 아닐까?
테크노에이블리즘은 기술 낙관론에 기반한 비장애중심주의다.
왜 휠체어를 위해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보다 로봇 외골격이 더 주목과 찬사를 받을까? 이동 보조기기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걷는’것이 더 정상성에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세계로 확산된 장애권리운동은 의료기관이나 복지시설에서 장애인이 보호받으며 생활하는 삶, 즉 시설화에 반대했다.
아우츠혼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 신체가 저항 없이 기술을 통합할 수 있다는 오해를, 매체가 호도하는 세련된 사이보그 이미지의 허상을 비판한다.
지금까지 장애-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또한 정상성 규범을 따르는 보조기술이 반드시 당사자들에게 더나은 일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그렇듯 이 장애인들 역시 기술의 일방적인 수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애를 의료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인식이 깃들어 있으며,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가는 것은 장애가 없는 삶에 비해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기술을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으로 재단하는 대신, 상황과 맥락 속에서 개별 기술이 장애인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자는 것이다.
장애인의 삶에 개입하여 그 삶을 유지해주는 기술, 그리고 장애를 교정과 제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가치관 위에 놓인 기술 양쪽 모두를 우리 앞에 제시했다.
인공 와우에 대한 의료계와 농인 공동체의 갈등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의사들은 청각장애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아 인공 와우 이식을 권유했지만, 농인을 ‘소수 언어’ 정체성으로 인식했던 농인 공동체에서는 이를 정체성에 대한 ‘말살’로 여기며 대립했다.
청각장애 아이에게 이식에 대한 선택권을 주지 않고 음성 언어의 세계로 편입시키는 것이 옳은지, 수어를 통한 언어 발달과 음성 언어를 통한 다소 불완전한 언어 발달 중 어느 것이 아이들을 위한 선택인지 분명한 답은 없다.
애플은 iOS12부터 일상생활의 특정한 소리를 아이폰을 통해 증폭해주는 ‘실시간 듣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이 기능을 홍보하는 영상에는 청각장애나 난청 등의 말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전동 킥보드를 비롯한 단거리 모빌리티 산업의 성장은 휠체어라는 보철의 특수성이나 낙인을 약화시킨다.
장애를 신체적-정신적 손상을 가진 개인만의 문제로 규정하는 의료적 모델에 맞서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애학의 관점을 도입하여 장애를 배제하지 않는, 접근성과 장애 정의 실현을 추구하는 기술을 이야기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햄라이와 프리츠가 제안하는 크립 테크노사이언스의 네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장애인을 지식인이자 제작자로서 중심에 둔다. 2) 통합이 아닌 정치적 마찰과 논쟁의 장소로서 ‘접근성’을 드러낸다. 3) 정치적 기술로서의 상호 의존성을 중신한다. 4) 장애 정의 실현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일상의’ 지식들이 제대로 포착된다면 장애인뿐만 아니라 취약함과 의존성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장애인 전문가와 장애인 사용자라는 구분은 희미해지고, 아예 흐트러진다.
장애 정체성과 자긍심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기술과 예술을 결합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다케코시 씨는 당사자라고 해도 자신이 진정으로 워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
‘따뜻한 기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술’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장애 접근성을 고려한 건축 환경이나 산업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유니버설 디자인’을 많이 떠올린다. ‘모두를 위한 설계’로도 불리는
‘모두를 위한’설계를 강조하다보니 오히려 배제된 신체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라는 원칙이 빠진 것이다.
보편적 설계를 지향하되 장애 정의와 접근성 실현을 설계의 중심에서 제외하지 않고, 장애인이 지식 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플라스틱 빨대 퇴출 운동은 접근성에 대한 요구와 환경운동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 되었다.
우선 빨대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장애인들이 노약자들에게 한 단계 더 추가적인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은 차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신체가 건강한 사람은 직원을 부르거나 카운터로 가서 빨대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다른 신체적 조건과 상황을 가진 사람은 행위가 한 단계 추가되기만 해도 접근성을 일을 수 있다.
더불어 특정한 진보적 가치를 위한 운동이 다른 권리운동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난치의 상상력]을 쓴 안희제는 많은 카드 뉴스 콘텐츠들이 장애인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술과 장애의 관계를 살피는 일은 기술 자체에 대한 접근성을 살피는 일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건강하고 장애 없는 몸을 가진 개인조차 그를 환대하지 않는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서는 얼마든지 장애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초엽 님이 이 논의를 ‘일상을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들’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물론 장애인에게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재활공학연구소 등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어요.
키오스크도 저에게는 직원의 말을 되물을 일이 없어 편해요. 하지만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은 스마트폰 앱이나 키오스크는 시각장애인이나 노인들에게 큰 장벽이 되고 있어요. 유튜브 같은 자막 없는 영상 매체들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좀 당황스러웠어요.